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재인/다른 정치인들과의 관계 (문단 편집) === [[노무현]] === || [[파일:external/file2.instiz.net/5539ad50b3577d869c778150ac0bc636.jpg|width=100%]] || [[파일:external/imgnews.naver.com/ldh1412201201091727402.jpg|width=100%]] || || 인권 변호사 시절 || [[참여정부]] 시절 || || [[파일:external/pds.joins.com/NISI20120916_0007043542_web.jpg|width=100%]] || [[파일:dassd.jpg|width=100%]] || || 노무현 전 대통령 퇴임 이후[* 문재인 뒤의 인물은 [[김경수]]다.] || 노무현 전 대통령 검찰 소환 당시 || ---- >'''[[노무현|그]]를 만나지 않았으면 적당히 안락하게, 그리고 적당히 도우면서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치열함이 나를 늘 각성시켰다. 그의 서거조차 그러했다. 나를 다시 그의 길로 끌어냈다. 대통령은 유서에서 '운명이다'라고 했다. 나야말로 운명이다.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 >---- > [[문재인]]의 저서 <문재인의 운명> 에서 ---- >'''"저는 제가 아주 존경하는, 나이는 저보다 적은 아주 믿음직한 친구 [[문재인]]이를 제 친구로 둔 것을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나는 대통령 감이 됩니다! 나는 문재인을 친구로 두고 있습니다! 제일 좋은 친구를 둔 사람이 제일 좋은 대통령 후보 아니겠습니까?"''' >---- > [[노무현]] [[전직 대통령|전 대통령]], [[https://youtu.be/GjEYLuN8CJ0?t=56s|2002년 부산광역시 선거대책본부 출범식 연설 중(56초 부근)]] ---- 너무나 잘 알려져 있듯이 [[노무현]]과 문재인은 '''말이 필요없는 서로의 인생의 동반자이자 베스트프렌드를 넘어 소울메이트였다.''' 유명한 [[친노계]] 전현직 정치인들을 보면 '[[친노계]]의 좌장'이라거나, '[[노무현]]의 적자'라고 불리는 정치인은 여럿 있지만 문재인만큼 [[노무현]]과의 인연이 긴 사람은 드물다. 대부분의 [[친노계]] 정치인들은 [[노무현]]이 정계로 들어온 후에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지만, 문재인은 [[노무현]]이 정계로 들어오기 전부터 동료 변호사로 인연을 맺었기 때문이다.[* 노무현과의 관계에서 문재인과 대등하게 비빌 수 있던 사람은 친노의 적장자로 불리우던 [[유시민]], [[안희정]], [[이광재]]뿐이었다.] 본인 자서전에 따르면 노무현과 인연의 시작은 처음 변호사가 되었을 당시 어떻게 할까 사무실을 고민하고 있을 때 검사로 발령나서 본래 노무현과 같이 사무소를 차리기로 했다가 못하게 된 [[박정규(1948)|박정규]] [[변호사]]의 주선으로 만난 것이었다. 당시 노무현은 나이도 1946년생이라서 문재인보다 한참 위였고 변호사 경력도 훨씬 위로, 당시만 하더라도 세무 • 경제 쪽으로 잘나가던 변호사였다고 한다. ---- [[파일:external/www.amn.kr/2016112806072002.jpg|width=500]] ---- 처음 만날 당시 노무현은 문재인이 대학생 때 운동권이었냐면서 놀랐다고 하며, 문재인은 노무현이 경력이 아득히 위임에도 다른 변호사들과 달리 콧대가 없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당시 사무소에 자신이 들어갈 자리가 잘 마련되어 있어서 처음부터 마음 편히 변호사 일을 시작할 수 있었으며, 애초에 노무현이 전문적인 여러 변호사들의 분업 시스템을 생각하고 사무실을 만들어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당시 노무현은 인권 변호사가 아니었지만 인권 문제에 이미 관여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 때문에 얼마 후 노무현은 정의감으로 하나둘씩 도와주기 시작하는 과정에서 인권 변호사이자 노동 변호사로서 운동권에 투신하게 되었고, 문재인 또한 덩달아 부산광역시와 울산광역시 전역을 누비면서 인권 운동과 노동 운동을 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노무현은 잘나가던 당시의 연들도 모두 청산하고 생활도 무척 힘들어졌지만 자신과 함께하는 후배 변호사를 위해서 늘 모범적으로 행동했다고 한다. 변호사이자 인권 운동가, 노동 운동가로서의 노무현은 아직 풋내기였던 문재인의 친구이자 선배, 형으로서 정말 많은 귀감이 되었는데, [[노무현]]은 아무리 사정이 어려워도 반드시 수입의 절반을 문재인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사회적 약자들의 소송을 맡아서 어떻게 이들을 도와줄까 같이 고민하면서 문재인의 변호 능력도 급상승했다고 한다. 문재인은 '[[법무법인 부산]]'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노무현]]이 [[통일민주당]]에 입당하고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한 이후 그의 충실한 참모이자 보좌관 역할을 맡았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는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대통령 선거 캠프의 [[부산광역시]] 지역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다. 노무현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고 [[참여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는 [[대통령비서실|청와대 비서실]]에 들어가 시민사회수석, [[민정수석|청와대 민정수석]][* [[국민의 정부]] 시절에는 이 민정수석직을 한때 아예 폐지했던 시절이 있었고, 그 기조를 이어받은 [[참여정부]] 시절에도 [[우병우]]처럼 민정수석이 [[대한민국 검찰청]]과 [[대한민국 경찰청]] 전체를 장악하고 조종할 만큼 강력한 힘이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전한다. 그래서 [[참여정부]] 개국공신들 중 비리 혐의로 잡혀들어간 사람들은 문재인에게 원한이 많다는 이야기도 있다. 검찰을 통제하거나 장악해서 자신들에 대한 수사로부터 보호해주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말이다.], [[비서실장#s-4]]을 역임했다. 하지만 무리해서 몸이 많이 상하자[* 치아가 10개나 빠져서 [[임플란트]]를 박았다고 한다.], 민정수석에서 사퇴하고 [[히말라야 산맥]]을 트래킹하며 여유롭게 지내던 중, 외신 신문을 통해 노무현 탄핵 소추가 벌어진 것을 알게 된다. 그러자 트래킹을 그만두고 급히 귀국한 뒤 정치인을 그만둔 상태였던지라 급하게 변호사 자격을 되찾고 변호인단을 꾸려 [[헌법재판소]]의 탄핵 기각을 이끌어냈다. 여담이지만 이때 맞붙었던 사람이 바로 당시 국회 법사위원장(소추위원) [[김기춘]]. 노무현이 퇴임한 뒤 시골인 [[봉하마을]]에서 [[농부]]로 지내고 있자 본인도 변호사로 돌아갔고 자주 놀러오면서 친분을 쌓았다. 그러다 노무현이 비리 수사를 받고 있을 때 그의 변호를 맡기도 했고, 2009년 5월 23일 세상을 떠난 후에는 병원에서 공개 기자회견을 열어 사망 소식을 전하였으며 [[https://www.youtube.com/watch?v=P8oyGXEHmAs|발표 영상 일부]] 화장 후 노무현의 장남인 [[노건호]]와 함께 고인의 유골을 빻는 일도 하는 등 정치적 상주 역할을 하였다. 노무현 사후에 설립된 [[노무현재단]]의 이사장을 역임하기도 했으며 현재도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노무현]]에게 있어서 문재인이라는 사람은 '''가장 필요한 순간마다 함께 했던 동료'''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력 정치인이 잘 나갈 때는 그의 곁에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편을 들어주지만, 그의 인기가 떨어지고 정치적으로 쇠락하기 시작하면 손바닥 뒤집듯이 단호히 선을 긋고 떠나가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우리나라 정치 세계에서 보기 드문 모습이다. '''나는 문재인이란 친구를 두고 있으니 대통령감이 된다'''던 [[노무현]]의 연설에서 볼 수 있듯이, [[노무현]]에게 문재인은 '''가장 믿음이 가는 사람'''이었을 지도 모른다. 문재인이 [[노무현]] 전 후보의 [[부산광역시]] 지역 선거대책본부장을 맡고 있었고, 이 연설을 [[부산광역시]]에서 했던 것을 미루어 보면 그냥 립서비스가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노무현]]은 대권을 잡은 후에도 문재인을 계속 중용하였고, 퇴임 이후에도 계속 그를 곁에 두었다. 이것을 보면 '''진심으로 믿었던 사람인 셈이라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사실 [[노무현]]은 성품이 직설적이라서 [[립서비스]]를 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이만큼 [[노무현]]이 직설적으로 칭찬해 준 사람은 문재인을 제외하고는 단 한 사람, [[유시민]]뿐이라고 한다. 대통령의 친구가 누구인지, 그리고 어떤지가 대통령의 자질과 무슨 관계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말의 논지를 제대로 들여다봐야 한다. [[노무현]]이 이 말을 꺼낸 것은 [[유유상종]]이란 말이 있듯이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으므로 궁극적으로 '''"나 [[노무현]]은 이런 훌륭한 친구를 두고 있기에 나 역시도 훌륭한 사람이며 나는 대통령 감이 된다"'''는 뜻이다. 즉, (친구 문재인은 물론) 본인이 능력 있는 인물이라는 걸 간접적으로 어필하는 내용이란 뜻으로, 이 영상에서 [[노무현]]과 문재인의 긴밀한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노무현]]은 '''적어도 내가 뼛골까지 신뢰하고 나를 뼛골까지 신뢰하는 깊은 우정을 가진 사람이 적어도 한 명 이상 존재한다'''라는 것을 강조하는 효과도 있으므로, 사람의 마음은 얻기 상당히 힘든데 노무현은 문재인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하여 국민의 마음을 얻을 자신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다만 노무현은 문재인을 친구라고 칭했지만, 문재인으로서는 자서전에 쓴 바에 따르면 노무현은 나이도 훨씬 많고 변호사로서도 한창 선배였던 사람인 데다 후에는 직장상사 같은 위치로서 대면했기 때문에 친구라는 그의 말은 자신에 대한 예우로 받아들였고 자신은 늘 자신보다 높았던 분으로 인식했다고 한다. 노무현은 주변 사람들에게 비권위적이었던 것과 별도로 매우 예우를 갖추었기 때문에 문재인에게 늘 존댓말을 사용했고 호칭도 예의를 갖추었다고 한다. [[김어준]]은 [[노무현]] 사후 문재인의 의연한 모습을 보고 이 사람이 대선 후보로 적격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무현이 자살한 후 감정적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담담하게 일처리를 잘해서[* 당시 장례식에 참석한 [[이명박]]에게 여기가 어디라고 오느냐고 소리치는 [[백원우]]를 말리면서 사태가 진정된 후 [[이명박]]에게 가서 머리를 숙여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자서전에 따르면 당시 본인도 똑같이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상주로서 문상객에게 사과한 것이라고 한다.] 호평을 받았는데, 그건 공식적인 자리에서 보여준 모습이고 집에 들어가자마자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어찌나 심했는지, 부인 [[김정숙]]이 저러다 남편이 크게 상하지 않을까 걱정돼서 [[http://biz.heraldcorp.com/view.php?ud=20170524000044|119를 불렀다고]] 한다. 그의 자서전인 '문재인의 운명'의 도입부는 문재인이 [[봉하마을]]에서부터 소식을 듣는 장면에 할애하고 있는데, 책 내용을 보면 문재인은 2009년 5월 23일 새벽에 [[김경수]] 전 비서관으로부터 노무현이 엄중한 상태로 병원에 옮겨졌다는 전화를 받고 병원을 급히 찾아갔지만, 이미 노무현은 호흡기만 떼면 바로 숨을 거둘 사실상 사망 상태였다고 한다. 문재인은 노무현이 그토록 험한 상황에 처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매우 의욕적으로 집필 중이던 책도 손에서 놔버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마치 멀리 떠날 사람처럼 인사를 하는 등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지만, 문재인 본인은 그런 징조를 전혀 알아채지 못하였고 노무현이 언제부터 유서를 머릿속에서 쓰기 시작한 걸까, 그것이 제일 견디기 어려운 부분이라고 책에 토로하기도 했다. 그는 일순간에 그런 문장을 다 쓰는 사람이 아니라서 이전부터 내용을 고려하고 있었을 거라고. 그리고 [[제18대 대통령 선거]] 회고록인 '1219 끝이 시작이다'에서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마지막 장면을 보고 자신은 저렇게 노무현을 보내주지 못했다고 자책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노무현의 비극적인 결말로 인하여 오랫동안 현실 정치와 단호하게 선을 긋고 살았던 문재인은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대한민국 대통령|대업]]까지 이루게 됐다. 그의 저서 '사람이 먼저다'에 따르면 "시민으로서 참여할 수 있는 정치의 영역도 무궁무진하게 많이 있는데, 꼭 직업 정치만이 답은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평생의 친구이자 선배 형님이면서 도반(道伴)[* 불교 용어로 "함께 불도를 닦는 벗"이라는 뜻으로 도(道)로써 사귄 친구라는 의미다. 종교를 떠나 두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기에 적절한 단어.]이었던 [[노무현]]의 비극적인 죽음에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두 민주 정부 10년 간 이뤄진 성과와 가치들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고 그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